써클이 무너진 날 — 사슬의 맨 아래에 있으면 벌어지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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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클이 무너진 날 — 사슬의 맨 아래에 있으면 벌어지는 일
스테이블코인을 만든 회사가, 스테이블코인 확장의 승자가 아니었다
6월 30일, 스트라이프·비자·마스터카드·코인베이스를 포함한 140개 이상의 금융·기술·크립토 기업이 'Open Standard'라는 컨소시엄을 꾸려 새로운 달러 스테이블코인 'Open USD'(이하 OUSD, 기존 디파이 코인 Origin Dollar의 동일 티커와는 별개 프로젝트) 추진을 발표했다. 같은 날 써클(CRCL) 주가는 보도마다 다르지만 하루 만에 14~18% 급락했다.
겹치는 뉴스도 있었다. 6월 초에는 비자·마스터카드·스트라이프의 자체 스테이블코인 플랫폼 준비 보도만으로도 주가가 흔들렸고, 이후 5개 주요 러셀 성장지수에서도 제외됐다(하락 원인을 OUSD 하나로만 단정하긴 어렵다). 52주 최고 262.97달러를 찍었던 주식이 지금은 60~80달러대를 오간다.
표면적으로는 '경쟁자 등장'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따로 있다. 스테이블코인 시장 자체는 계속 커지고 있다. 아무도 스테이블코인이 실패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정작 이 시장을 만든 회사의 주가는 반대로 갔다.
왜 시장이 커지는데 만든 회사는 지는가
이건 리타 프레임으로 이미 여러 번 확인한 패턴이다. 새로운 변화가 생겨나면, 변화를 만든 자가 돈을 버는 게 아니라 그 변화를 흡수해서 자기 산업으로 확장시키는 자가 폭발적으로 자산을 늘린다.
써클은 이 사슬의 맨 아래, 원자재를 공급하는 자리다. 비자·마스터카드·스트라이프는 이미 가맹점과 소비자 양쪽을 락인한 결제플랫폼 레이어에 있다. 이들이 "우리도 발행하면 된다"고 선언한 순간, 아래 레이어는 그냥 상품(commodity)이 된다.
써클이 대부분의 항목에서 탈락하는 이유
6가지 병목 기준으로 써클을 대조하면 왜 이렇게 쉽게 뚫렸는지가 보인다.
| 기준 | 써클(발행사) | 비자·마스터·스트라이프(플랫폼) |
|---|---|---|
| 대체 불가능성 | 낮음 — 140개 이상 기업이 참여한 경쟁 모델 등장 | 높음 — 대체 가맹망 구축에 수십 년 |
| 락인 | 약함 — 스테이블코인은 유통망 따라 선택이 갈림 | 강함 — 가맹점·카드 인프라 이미 장악 |
| 가격전가력 | 준비자산 이자수익에 종속, 금리에 취약 | 수수료 구조를 그대로 유지한 채 레일만 교체 |
| 자동 수요증가 | 없음 — 발행량이 곧 매출이 아님 | 있음 — 결제량 자체가 이미 수익원 |
써클의 매출은 여전히 준비자산 이자수익 비중이 절대적이다. 그런데 이번 발표로 발행 자체보다 '누가 유통망과 결제 접점을 쥐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점이 부각됐다. 병목이라기보다 진입장벽이 낮은 상품에 가까웠던 셈.
결제플랫폼은 왜 손해 볼 게 없나
비자·마스터카드·스트라이프에게 스테이블코인은 위협이라기보다 원가 절감 수단에 가깝다. 이들은 이미 소비자와 가맹점을 양쪽에서 잡고 있는 플랫폼이라, 기존 결제망과 가맹점 접점 덕분에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다. 카드망 수수료 구조를 유지한 채, 정산 레일만 더 싸고 빠른 것으로 바꿔 끼울 수 있다는 뜻.
같은 논리가 6월 26일 반대 방향으로도 확인됐다. 써클과 노무라가 일본 기업 대상 USDC 기반 외환결제 서비스를 발표하자 주가가 하루 만에 7% 튀었다. 정확히 겹치는 이유다 — 노무라는 결제플랫폼 레이어에서 이미 일본 금융 관계망을 갖고 있고, 써클의 스테이블코인은 그 관계망 위에 얹히는 원자재가 됐을 때만 가격이 붙는다.
코인베이스는 사슬 위가 아니라, 사슬 두 칸을 동시에 먹으려 했다
여기서 재밌는 사실 하나: 써클은 2024년 한 해 동안 USDC를 자기 플랫폼에 호스팅해준 대가로 코인베이스에 9억 800만 달러를 지급했다(연도별로 금액은 달라질 수 있다). 이건 이미 "코인거래소 < 스테이블코인"이 아니라 반대라는 걸 보여준다. 코인베이스는 애초에 써클 위에서 통행료 성격의 수익을 받는 자리였다.
그런데 이번엔 그 자리에 머물지 않았다. OUSD는 코인베이스 자체 L2 체인인 Base를 포함해 솔라나·스텔라·폴리곤에 동시 배포될 예정이고, 코인베이스는 자신이 써클의 가장 중요한 유통 채널이었던 바로 그 위치에서 컨소시엄에 합류했다. 거래소(기존 자리) + 체인 인프라(Base) + 발행 공동참여(거버넌스·준비자산 수익)까지 세 레이어를 한 번에 흡수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하지만 시장은 이걸 무위험으로 안 봤다. 같은 날 COIN도 -3.6% 빠지며 52주 신저가를 찍었다. 안정적으로 받던 수익 일부를 자기 손으로 줄일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아직 불확실한 컨소시엄 참여로 바꾼 셈 — 자기잠식(cannibalization) 리스크로 볼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 '도입'이라는 뉴스에 뒤늦게 써클을 사는 건, 사슬의 맨 아래 링크를 사는 것과 같다. 최소 세 수 앞은 이미 "누가 이 변화를 자기 인프라에 흡수할 수 있는가"를 봐야 한다. 결제플랫폼이 그 자리였고, 이번 사건은 그걸 숫자로 보여준 것뿐이다. 그리고 코인베이스의 사례는 한 가지를 더 알려준다 — 사슬을 올라타려는 시도 자체도 무위험은 아니다. 확실한 통행세를 불확실한 지분으로 바꾸는 건 베팅이다.
8월엔 극적인 결론보다, 조건이 조정될 가능성을 지켜봐야 한다
써클과 코인베이스는 2023년 8월 18일 Collaboration Agreement를 맺었고, 최초 계약 기간은 3년이다. SEC 공시 원문을 보면 이 계약은 "협상 실패 시 종료"가 아니라 일정 기준(Threshold Criteria)을 충족하면 자동으로 3년씩 갱신되는 구조다. 기준을 못 채워도 계약 전체가 깨지는 게 아니라, 특정 수익 항목만 조정되는 식으로 설계돼 있다.
즉 8월에 "결별이냐 재계약이냐"의 극적인 결정이 나는 게 아니라, 조건이 자동으로 이어지거나 일부 항목이 조정되는 정도로 보는 게 더 정확하다. Dragonfly의 Omar Kanji도 이번 OUSD 발표로 결별 가능성이 더 현실적으로 보이게 됐다면서도, 결국 조건을 조정해서라도 관계를 이어갈 가능성을 더 높게 봤다. 통행료 조건이 실제로 어떻게 바뀌는지가 코인베이스의 진짜 포지션을 보여줄 숫자다.
결제플랫폼도 결국 위 레이어에 종속된다
사슬을 한 칸 더 밀면, 결제플랫폼조차 결국 공개키 암호 서명이라는 신뢰 기반 위에 서 있다. 장기적으로는 양자컴퓨터가 이 신뢰 기반을 흔들 수 있다는 게 NIST 등에서 나오는 논의이고, PQC(양자내성암호) 전환이 다음 사슬로 이어질 후보다. 이번 글의 범위를 벗어나는 얘기라 짧게만 짚어두고, 다음 시리즈에서 따로 다룰 예정.
이 사슬을 다시 굴리는 연료는 AI 인프라다
새 기술이 등장하고(스테이블코인) → 더 큰 인프라가 흡수하고(결제플랫폼) → 그 신뢰 기반을 보안이 지키는(PQC) 이 순환 전체를 다시 돌리는 연료는 AI 사이클이다. AI 에이전트가 직접 결제를 실행하는 시대가 오면, 정산 속도와 서명 신뢰는 다시 스테이블코인 인프라로 돌아온다. 사슬은 직선이 아니라 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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